우리 몸에서 가장 단단한 근육은 심장도 아니고 바로 혀라고 한다. 근육은 쓰면 쓸수록 단련되는 법인데, 가장 단단하다고 하니 우리가 혀를 심장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할 정도로 자주 쓰고 있다고 짐작해본다. 말을 하지 않는 게 오죽 힘들면 그걸 수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할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말이 참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이 어떤 것인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아마 언어학자들이 그럴 것이다). 사람들에게 “말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선 짐승 말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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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반대로 하면 모르는 만큼 안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용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잘 알지 못하고 사용할 경우 실수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일으키고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나 혹은 점점 더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말도 그러하냐고? 과연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러하다.

그 실수의 대표적인 예가 차별이다. 차별이라는 단어는 폭력, 배제, 억압, 다수와 소수, 경멸, 무시, 고정관념이라는 단어들과 관련이 깊다. 우리가 평소에는 최대한 지양하려는 행위를 말을 통해 은연중에 하고 있다는 사실. 가령 우리가 비속어로 자주 사용하는 “병신”이라는 말은 실제로 몸의 상태가 그러한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을 담고 있다. 그들에겐 트라우마인 몸의 장애를 농담거리로 사용하는 것이니 말이다. 또 “남자답게 ~해야지”, “여성스럽게 “와 같이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표현은 우리의 다양성 자체를 성 역할 안에 가둬버리는 억압 그 자체다. 신체적 성별을 떠나 다양한 성격과 특징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것을 빌미로 일방적 준거를 제시하고, 그에 맞지 않을 경우 “기생오라비”, “숫기 없는 놈” 따위의 낙인을 박아버리는 것은 분명히 폭력이다.

또 다른 실수의 예로는 공감의 부재가 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감 능력은 한 사람에게 있어선 개인의 차이일 수 있으나, 공감 능력이 부족한 표현이 통용되는 한 사회의 삭막함은 충분히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지표로 볼 수 있다. 가령 좋지 않은 것을 보거나 마음이 답답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흔히 쓰는 “암 걸린다”, “암 덩어리다”라는 표현은 실제로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중압감을 기호적으로 소비하는 말이다. 절망스럽거나 곤혹스러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쉽게 튀어나오는 “자살하고 싶다”, “죽고 싶다”라는 표현은 벼랑 끝에서 진지하게 제 죽음을 고민하는 사람 그리고 실제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골몰을 경시해버리는 말이다.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쓰는 말은 미디어와 사회 분위기에 의해 쉽게 조작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쓰는 말을 스스로 검열함으로써 이 “말의 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지는 폭력에선 가해자도 피해자다. 말을 꺼내기 전에 “그 사람 앞에서”도 할 수 있는 말인지 생각해 보라. 팔다리가 온전치 않은 사람 앞에서 친구에게 “병신”이라며 낄낄댈 수 있는지, 암 환자 앞에서 “암 걸린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지, 다리 위에서 생의 끝을 다짐하는 누군가 앞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로 나의 답답함을 표현할 수 있는지. 우리가 쓰는 말은 줄곧 하향식으로 조작됐지만, 역으로 우리가 올바른 언어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곧 온전한 사람”이라는 옛말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