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겨울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고 봄, 가을은 점점 그 경계가 무색해지는 요즘, 내게는 어떤 계절의 시작을 결정하는 내 멋대로의 기준(?)이 있다. 점심 즈음, 길을 걷다 뒷목 언저리가 뭉근하게 데워지면 봄, 신발끈 묶다 땀이 나면 여름(나는 땀이 많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면 가을(붉은 단풍 말고, 오직 노란 은행잎만!), 그리고,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면 겨울. 내 멋대로이긴 하지만, 나름 직관적이고 분명한 계절 구별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에도 드디어 겨울이 왔다. 며칠 전부터 최저 기온이 0도 근처를 배회하더니, 기어코 영하의 기온을 기록한 것이다. 문 밖에서 서성이던 겨울이, 왈칵 문을 열고 들어온 것 같다. 하잘것없는 일들로 뒹굴거리다 새벽 4시쯤 잠들어도, 겨울 특유의 찬 공기와 냄새 때문에 꼭 오전 8시쯤엔 잠깐, 눈을 뜨게 된다. Stevie Wonder와 Andra Day가 부른 ‘Someday at Christmas’, 자이언티의 신곡 ‘눈’, 혁오 밴드의 ‘공드리’ 양다일과 정키의 ‘우린 알아’ ..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유난히 잘 어울리는 계절. 그렇게 겨울은 갑자기 찾아왔다.

‘추운 집에 사는 여자’

겨울은 또, 책을 읽기도 좋은 계절이다. 다들 독서의 계절을 가을이라고 하지만 글쎄, 봄이나 가을처럼 외출하기 좋은 계절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내겐 겨울이 독서의 계절이다. 특히 겨울엔 실용서보다는 에세이나 시집이 좋다. 최근엔 한수희 작가의 ‘온전히 나답게’ 라는 책을 읽었다. 조금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한 그녀의 글은, 오히려 그래서 더 담백하고 진정성있게 다가왔다. 웃기려고 하지 않아도 웃기고, 슬퍼지려 하지 않아도 슬픔이 묻어있는 글.

내 생각에 그녀의 글이 그럴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그게 그녀의 삶이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게 그렇잖나, 남을 웃기거나 울게 하려고 하는 연기가 아닌데도 그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삶의 희로애락을 실감하게 되니까. 그런 그녀의 삶이 적힌 에세이 ‘온전히 나답게’ 중에서도, 유난히 겨울 냄새가 진한 글이 바로 ‘추운 집에 사는 여자’ 였다.

시세보다 아주 싼 값에 들어간 오래된 주택, 그 말도 안 되게 추운 집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7년째 살고 있는 이야기다. 약 7페이지에 달하는 에피소드는, 크게 구분된 단락의 첫 문장만으로 깔끔하게 요약할 수 있다.

  1. ‘내 블로그의 제목은 ’추운 집에 사는 여자‘다.’
  2. 집이 추운 이유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3. 추위를 막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했다.
  4. 추운 집에 산 지 올해로 7년째다.
  5. 결국 우리는 추위에 적응한 것이다.
  6.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이렇게 춥고 불편한 집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이 집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단락의 첫 문장만으로 요약되는 글. 그런 점에서 구조적으로도 간결하고 탄탄한 글이다. 아무튼, 이 글을 읽고 나면 3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

  1. 한낱 인간은 추위라는 대자연에게 이길 수 없다.
  2. 이기지 못한 인간은 패배하지 않고 적응한다.
  3. 그리고 인간이란, 그런 추위와 불편함조차도 사랑할 줄 아는 존재다.

각자의 계절, 각자의 집.

그녀의 글을 읽으며 ‘웃픈’ 마음이 들다가도, 문득 내 좁은 원룸의 준수한 난방 시설이 감사했다. 온수도 잘 나오고, 외풍도 없다. 책 출판일을 보니 2016년 8월, 초판 3쇄 본이다. 그녀가 인세로 이사를 가지 않은 한, 여전히 그녀는 그 ‘추운 집’에서 어떤 글을 적고 있지 않을까. 그녀와 나는 같은 계절을 살지만, 같은 온도는 아닐 테다.

사실 집뿐만 아니라 우리는 서로 제각기 다른 삶의 순간을, 삶의 과정을 살아간다. 각자의 계절을 나고, 각자의 집에서 생활한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태어나 한 번도 겨울을 맞아본 적이 없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눈뜬 그 순간부터 여태까지의 삶이 내내 혹독한 겨울이었을 수도 있으리라. 또 어떤 사람에겐 겨울이 낭만이겠지만, 누군가에겐 겨우 살아내는 괴로운 계절일 수도 있고.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계절 속에 살고 있는가.

어느 하루 추위를 겨울이라 부르지 않듯이

얼마 전, 라디오 다큐멘터리 대본을 마무리하고, PD분들에게 전해드렸다. 토크 형식으로 진행되는 ‘토크멘터리’ 라 쑥스러운 녹음도 진행했고, 전문 성우 분께서 내가 쓴 대본 중, 내 시를 직접 읽어주시는 영광도 누렸다. 다큐의 주제는 ‘부산 청년’. 이 시대의 청년들, 그 중에서도 부산 청년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부산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사실상 곧 서른인 나를 위한 다큐였다. 그래서 운 좋게 내가 작가를 맡을 수도 있었고.

청년의 시기를 흔히 ‘청춘(靑春)’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푸른 봄’ 인데, 사실 그 이름 그대로 푸르기만한 봄은 아니다. 취업, 결혼, 육아, 노부모 부양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정 중 뭣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나도 예전엔 청춘의 푸름이 봄의 그것이 아니라, 맞고 부딪혀 멍든 자리의 푸름이 아닐까 하는 비관적인 글을 적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글을 적을 때의 내 마음에도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다큐를 위해 청년들과 전문가들을 섭외하고, 직접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은 분명한 봄이었다. 꽃샘추위를 겪는 봄. 봄을 시샘하는 추위를 견뎌내고 나면 꽃 피울 것을 믿는 봄. 계속 도전하는 봄. 그들을 응원하려 다큐를 제작하면서 내가 더 많은 힘을 얻었다. 그렇다. 봄날, 어느 하루의 추위를 겨울이라 부르지 않듯이, 삶의 어느 한 순간, 한 시기를 두고 삶 전체를 단정지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계절, 창밖에도 내 마음 속에도 여전히 찬바람이 불고 추위가 들이친다.

괜찮다. 봄이 올 것이기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