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쓰는 삶

논리가 필요 없는 삶. 일단 울고불고, 바닥에 엎어져서 뻗대보는 삶. 부모든 누구든 당신네 사정은 모르겠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위해 마음껏 떼쓰던 삶. 누구나 유년기의 한때, 그렇게 ‘떼쓰는 삶’ 이 있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나 또한 그런 삶이 있었다. 나는 성격이 차분한 대신 소위 ‘똥고집’ 에 알량한 자존심까지 강했던 탓에 울거나 소리 지르는 식으로 떼를 쓰지 않고,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굳어 서있는 방식으로 떼를 썼다. 그 ‘떼’를 당해내야 하는 입장에선 오히려 더 괴로운 방식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 김해에 드물게도 흰 눈이 폴폴 나리던 유년기의 어느 겨울,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까지 버스도 쓰레기 수거 차량도 오지 않는 제도권 밖의 삼계동 귀퉁이에 살았다. 가난을 이유로 어린 자식에게 추위와 서러움을 가르칠 수는 없던 엄마는 당시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동상동 재래시장 같은 곳에서 재첩을 사와 뽀얀 재첩국을 끓였다. 지금도 입이 짧아 날것, 버섯 같은 것들을 잘 먹지 못하는 나는, 엄마의 그 고생을 모르고 재첩국에 입도 대지 않았고, 엄마는 혼도 낼 겸 재첩국도 먹일 겸 나를 집 밖으로 내쫓으셨다. 살을 에는 추위에, 어지간하면 “죄송합니다..” 하고 기어들어갈 법도 하건만, 나는 몇 십 분을 독하게 서서 ‘무언의 떼’를 썼고, 그 덕분에(?) 재첩국은 먹지 않았지만 더 크게 혼나야만 했다.

비록 혼날지언정, 그렇게 막무가내로 떼쓰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던 시절. 삶 중에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저 “힘들다” 한 마디를 건네는 그 일조차 피차 힘들게 살아가는 서로에게 짐이 될까 입을 꾹 다물어야 하는 어른의 시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말이다. 떼쓰는 삶, 그것도 그 시절의 특권이었으리라.

애쓰는 삶

프리랜서의 삶이 다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내가 가진 핵심 역량을 파생시켜 이런저런 일들을 겸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그 중 하나가 재수학원의 국어 강사 겸 자기소개서 컨설턴트였다. 재수를 해본 적도 없고, 딱히 치열한 고3 수험생 시절을 보낸 적도 없는 나로서는 ‘대학에 간다’ 는 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부를 한다. 수능을 친다. 원서를 넣는다. 신입생이 된다. 끝.

그랬던 내가 재수생들을 마주하면서 요즘의 학생들이 얼마나 ‘애쓰는 삶’ 을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아니 사실 더 애쓰는 학생들은 오전 6시 반에 직접 학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밤 11시에 직접 학원 문을 닫고 나가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그런 학생들 모두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뭐 이런 대학을 희망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냥 적당히 해도 갈 수 있을 것 같은(어디까지나 십수 년 전의 내 기준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 가장 푸른 청춘의 한때를 네모난 학원의 네모난 책상에서 네모난 책과 시험지를 붙들고 보낸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꾸는 꿈은 ‘네모의 꿈’ 보다 거창하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 지점에서, 비록 학생과 선생으로 만났지만 나 역시 비슷하게 ‘애쓰는 삶’을 살고 있었다. 뭐 대단한 직업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먹고 살만한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원래 학과를 놔두고서 취업률 집계도 제대로 되지 않는 국어국문학과로 전과했으니. 대작가가 될 것 같던 오만과 편견의 시간은 겨울 노을보다 빨리 저물고, 나는 꿈을 위해 ‘글을 쓰는’ 대신 생계를 위해 무엇이든 ‘애쓰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제 삶을 위해 애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목적의식 없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코앞의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한, 그런 ‘애쓰는 삶’ 이 애처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쓰느라 애달프고, 애달파도 애써야 했던 시절. 내 이십대는 애쓰느라 닳아버린 열정을 남겼다. 몽당연필처럼 뭉툭하게 닳아버린 열정으로 쓰는 모든 꿈과 희망들은,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번지곤 했다.

비로소, 글 쓰는 삶

삶에서의 ‘계획’ 이라는 건 어쩐지 이 단계와 저 단계를 이어주는 ‘외줄’ 같다. 그 외줄마저 없으면 다음 단계로 향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만, 외줄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음 단계로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외줄처럼 위태로운 계획을 타고 삶을 살아가는 일 속에는 내가 계획하지 않은 수많은 변수들이 끼어든다. 그런 변수들은 계획이라는 외줄에 살을 더해 꽤 그럴 듯한 다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도달 직전의 외줄을 허망하게 끊어버리기도 한다.

국어국문학과로 전과한 후, 줄곧 ‘글 쓰는 삶’을 바라왔다. 남들이 자격증이다, 대외활동이다 하며 취직을 위한 스펙을 쌓을 때 나는 경주로, 고령으로, 진주로 백일장을 찾아다녔고 전국의 대학 문학상에 매월, 매주 시와 수필을 응모했다. 남들이 취업스터디를 하며 시사상식을 공부하고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할 때, ‘여실지’ 라는 스토리텔링 창작 동아리에서 연극이며 영화를 보러 다니고, 소설을 쓰고, 시를 썼다. 행복한 대학 시절이었다. 글 쓰는 일이 학업의 연장선이고, 성장의 밑거름이 되던 시절이었으니.

하지만 졸업 즈음해서, 글 쓰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면서 동시에 가장 무가치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돈이 되지 않았고, 자격증처럼 증명할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공모전에서 소위 ‘광탈’ 하고 나서, ‘글 쓰는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지은 외줄을, 내 손으로 끊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그것도 그 외줄의 한가운데에서.

그 때, 칸투칸 프리터를 알게 되었다. 그 때, 근무하던 학원에서 교육 칼럼과 ‘수험생을 위한 이름시’를 연재하게 되었다. 그 때, 학과장님의 추천으로 라디오 방송국 작가로 일하게 되었다. 스스로 외줄을 끊고 추락을 다짐하던 그 때, 거짓말처럼 내 계획과는 무관한 변수들이 끼어들었고, 나는 다시, 비로소, 글 쓰는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내 이름으로 된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쓰고 나면, 그게 다 내 삶

100세 시대, 아직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내가 하기에 가소롭고 교만한 말일 수도 있으나, 떼쓰고 애쓰고 그러다 이제 글 쓰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네 삶은 결국 이야기이고 뭐가 됐든 일단 쓰고 나면, 그게 다 내 삶이 된다는 거다. 그러니까 진짜 중요한 건, ‘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멈추는 순간, 우리 삶의 일부가 빈 페이지로 넘어가버리니까.

진득하게 몇 개월, 몇 년 열중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진리를 늦게 깨달았다. 열정은 ‘활활 타오르는 불’이라기보다는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불’ 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어떤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속도나 방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멈추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하루도 의미 없는 날은 아니라는 것을.

떼쓰는 것이 유년기의 특권이고, 애쓰는 것이 우리 삶의 숙명이라면 글 쓰는 것은 내가 선택한 내 삶의 방편이다. 무엇이 되었건, 쓰자. 쓰는 삶이야말로 살아있는 삶이니까.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날엔 걱정 없이 펑펑 돈 쓰는 날도 하루쯤 오지 않을까. 안 와도 어쩔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