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fan

서로 다른 인생을 살지만 일반적으로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그런 인생의 공통분모가 있다. 첫사랑에 빠졌던 기억, 사춘기 시절 매정하게 방문을 걸어 잠갔던 기억, 하기 싫은 공부를 미루다 시험 전 날 벼락치기해본 기억, 무수한 취업 실패의 경험과 감격스러운 첫 월급의 기억 같은 것들. 사실 더 말해보라면 끝도 없다. 우리는 광의적으로는 거의 비슷한 인생들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런 공통분모 중 일부 누락되었거나 아직 같지 못한 것들이 있다. 바로 어떤 스타의 열성적인 팬이 되어보는 일이다. 다들 한 번쯤 걸 그룹에 열광할 법한 학창 시절이나 군 복무 시절에도 나는 걸 그룹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좋아하는 배우는 있었지만 그 사람이 아니라 그저 그의 연기를 좋아했을 뿐이다. 어디 팬클럽에 가입해본 적도, 팬 카페에 가본 적도 없다.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한 명을 집어 얘기해본 적이 없다. 스포츠 스타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직접 축구를 하고 바벨을 들어 올리는 것을 선호하지, 누군가에게 열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의 Big fan 이었던 적이 없는 삶. 한 번도 불편한 적 없지만, 요즘은 왠지 허전하다. 그렇다고 이제 와 삼촌 팬을 자처하고 싶지도 않다. 됐다, 나는 그냥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Big fan이 되기로 했다.

Adagio

느리게, 아주 느리게. 요즘 내가 가장 염원하는 것이다. 우선 인생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내가 걷는 속도는 여전한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다. 또 요즘은 일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프리랜서에게 이것은 분명 기회이지만) 심신이 늘 지친 상태다. 사람이 어느 정도 극단에 이르면 무의식의 영역에서 불쑥,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의 일면을 보게 된다.

나는 노래 듣는 건 좋아해도, 미술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문화생활 정도로 1년에 한 번, 비엔날레 정도는 갔었다. 비엔날레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뭐 볼거리가 많기는 한데, 뭔 뜻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미술이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나는 미술을 즐기거나, 미술관과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은 난데없이 ‘미술관’ 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피자집에서 청국장 찾는 것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래서 한 번은 진짜 미술관에 갔다. 토벽동인전과 이우환 공간전을 감상했다. 별 생각 없이 갔다가 도슨트 시간과 잘 맞아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설명이 곁들여지니 재미도 있고, 문화생활 한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도슨트 중간에 요의 때문에 화장실에 갔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내 머릿속에 자꾸 미술관이 떠올랐던 이유는 그저 느리게, 아주 느리게 사는 걸 경험해보고 싶어서였다. 미술관 특유의 착 가라앉은 공기, 그 공기 속에 가루처럼 섞이는 소음들, 통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느리게, 아주 느리게 걷기만 하면 되는, 그런 Adagio가 필요했던 거다.

x

오답, 거절, 실패. 우리네 삶의 x는 대충 이 정도 의미다. 이미 결론이 난 것. 그런데 그 결론이 좋지 않은 것. 그래서 x하면 괜히 잘못한 것 같고, 두렵고, 틀린 것 같다. 그런데 이 x를 미지수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직 아무것도 결론나지 않은 것.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겁먹고 포기하면 미지수로 남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나름의 답을 내놓는 것.

앞으로 내가 어떤 누군가의 Big fan 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를 염원하며 하루 13시간씩 일을 하는 지금의 내가 무엇이 될 지는 미지수다. 내가 나 스스로를 잘못되었다고, 틀렸다고 말하기 전까지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x 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