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힘들다 보니 어설픈 위로만 늘었다.

‘괜찮다’라는 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 ‘신은 사람에게 견딜 수 있는 고난만 준다’는 말.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누구라도 안다. 다만, 고통받는 그 순간에 이러한 말들을 떠올려 버틴다. 저혈당 쇼크가 온 사람에게 순간의 기지로 사탕을 입에 물리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그때뿐. 다만, 한 가지. 고통이나 역경은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덜 하다. 어쩔 때는 그것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인생이 그렇다. 그래서 이래저래 굴러간다.

살아가기보다는 살아내야 하는 세상이다.

너무 힘들어 스스로 감내가 안될 때, 이 상황이 빨리 흘러갔으면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다. 그리고는 어찌어찌해서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갔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정말 그럴 수도 있지만, 안타까운 건 그와 함께 우리의 인생, 시간, 감정, 영혼의 시간까지 함께 가버린다. 그러니 고통이나 역경이 지나갔다고 좋아만 할 일은 아니다.

신이 말했는지, 사람이 말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견딜 수 있는 고난만 온다’라는 말도 알고 보면 거짓이다. 대부분의 고난과 역경은 견딜 수 없는 만큼 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찾는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때로는 회피를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견딜 수 없지만 그저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즉, 위로하려는 자의 말장난이다. 견딜 수 있는 고난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으로 인해 견딜 수 있는 정도가 커지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살충제에 시간이 갈수록 내성이 커지는 벌레와도 같이 말이다.

참, 살기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겨우 ‘살아내고’있다. 너도나도 서로에게 이러한 인생의 고달픔을 응원하고 격려해야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생존’ 앞에 우리는 ‘인격’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우왕좌왕하는 벌레와도 같기 때문이다. 극심한 인생의 고통에 잠자고 일어난 다음 날, 벌레로 변하여 그 자신의 고통 정도를 표현했던 ‘그레고르 잠자’가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

진정한 위로는 어디 있을까.

가상현실로 여기저기에서 괴물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떠올린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진리’와 ‘위로’, 인생에 대한 ‘답’도 저렇게 찾을 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를 덜렁 싸질러 놓고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절대자라는 존재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어설프게나마 ‘위로’라는 단어를 만들어 놓고는 정작 찾기 어렵게 해놓은 그의 몽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출생 입사(出生入死)’, 즉 우리의 인생은 태어나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향해가는 것인지 애매함 그 자체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 들 때도 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허탈한 것이 그 이유다.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의 중간, 극도의 희열과 극강의 절망의 중간에 행복과 위로가 있을지 모른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위로가 되어야 한다. 고통받는 것도 우리고, 이겨내야 하는 것도 우리고, 위로해야 하는 것도 우리다. 수평이 절대 되지 않는 시소에서, 그 균형을 잡아야 너는 행복할 수 있다는 신의 가혹한 숙제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앞에서 말이다. 결국, 균형을 잡아야 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금, 두 팔을 가지런히 모아 스스로를 안아보자. 우습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한 이 모습이 바로 ‘사람’이고, 이 행위가 ‘인생’이다. 이 둘을 합쳐 우리는 그것을 ‘위로’라 말해보자. 일단, 이거라도 해보자. 살아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