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 만난 아이스크림 디저트는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내가 시킨 것이 아니라, 메뉴에 속해 있는 이른바 ‘서비스’의 그것이었다. 가뜩이나 불어난 체중으로 인해 매 순간 덜먹어야겠다는 다짐과, 당분을 더 이상 섭취하지 않겠다던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는 정당성의 합리화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더불어 내가 먹지 않았을 때 녹아내릴 그 비주얼을 안타깝게 여기는 오지랖까지 발동한다. 결국 그 작은 스푼을 들어 ‘한 입만’을 되뇌며 아이스크림을 푸는 순간, 이미 정신이 들었을 땐 녹아내려 국물 모양이 된 아이스크림의 흔적을 없애버릴 요량으로 바닥을 긁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왜일까. 그래, ‘달콤함’ 때문이다.

달콤한 유혹

‘달콤함’을 말하면 ‘유혹’이란 단어가 어김없이 뒤따라 온다. 그리고 그 둘을 붙였을 때, 그렇게 잘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은 몇 되지 않는다. 더불어, ‘유혹’이란 단어 자체가 그리 긍정적이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볼 때, 이를 수식하는 ‘달콤한’ 또한 그 궤를 같이한다. 아니, 어쩌면 ‘유혹’이라는 말보다 더 강한 부정적 의미를 안고 있다. ‘유혹’이란 말은 ‘꾀어서 좋지 아니한 길로 꾐’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 ‘유혹’은 달콤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상대방을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식사 후의 디저트는 너무나 달콤했다. 그것에 반하던 나의 의지를 손쉽게 불식시키고 마침내 나를 유혹했다. 그렇다면 과연 ‘달콤함’은 무엇일까?

달콤함의 중의성

‘달콤함’은 말 그대로 ‘맛’이나 ‘풍미’를 말한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를 한 번 짚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달콤하다
1. (음식이) 감칠맛이 있게 꽤 달다.
2. (무엇이) 마음이 끌리게 아기자기하고 기분이 좋다.
3. (잠이나 쉼이) 편안하고 포근하다.

[어학사전]

시작은 ‘맛’에서 비롯되었을지언정, 우리는 이 ‘달콤하다’란 말을 상당히 많은 곳에서 사용한다. 요즘은 ‘꿀 떨어지는’이라고 표현하여 사람의 눈빛이나, 말투에도 그 의미를 넓혀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그 ‘달콤함’의 끝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단순한 예를 들어, 달콤한 것들을 즐기고 가까이할 때 당장에 겪게 될 비만이나 성인병의 결과 들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달콤한’ 시간에 빠져 일어나는 일들이다. 당장 시험이 코 앞인 사람들에게도 ‘꿀잠’의 유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마약’ 또한 달콤함의 극치를 주는 존재다. 그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달콤함은 ‘악(惡)’인가?

‘유혹’을 돕는 달콤함은, 그렇다면 ‘악’일까? 인류의 ‘원죄’의 기원은 아담과 이브의 사과에서 비롯되었다. 영혼을 팔아 지식의 욕심을 채우려 했던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은 술과 이성(異性)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달콤함’의 상징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류 역사의 흐름과 문학의 줄거리들을 살펴보았을 때, 술과 이성은 ‘달콤한 유혹’의 대표적인 도구로 많이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그 ‘달콤한 것들’의 자체는 ‘악’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아이스크림도 죄가 없고, 이브가 땄던 사과도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술과 이성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살아가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되어 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 ‘달콤함’이 ‘악’이거나 ‘죄’가 아니라, 그것에 넘어가는 우리가 잘못된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달콤함’이 ‘악’이라기보다는, ‘악’이 달콤함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접근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그래서, 달콤함은 왜 ‘유혹’일까?

우리는 ‘달콤함’의 맛을 안다. 달콤한 무언가를 입 속에 넣는 순간,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고 이는 행복감이나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즉, ‘달콤함’은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성과 제어로는 어찌할 수 없는 ‘본능’에 가까운 느낌. 그 느낌이 강렬하여, 우리는 그래서 ‘달콤함’이라는 비유를 여러 곳에 들이댄다. 입으로 시작된 그것은, 온몸으로 퍼지고 마침내 생각과 정서 그리고 영혼의 어루만짐까지 퍼지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을 몸도 원하고 마음도 원하고 영혼도 원하는 것. 힘들 때나 슬플 때, 기쁠 때나 행복할 때 언제든 그 ‘달콤함’을 맛 볼 준비를 한다. 기대를 하고, 바라고 또 바란다. 없으며 없는 대로, 느껴본 사람은 더 많은 달콤함을 원한다. 그러니, ‘유혹’이라는 수식어로 ‘달콤함’이란 말을 갖다 붙이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사람은 ‘본능’을 이길 수 없다. 즉, ‘달콤함’에 대한 갈구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달콤함’ 그 자체는 ‘악’이 아니 이기에,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다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어쩌면 ‘달콤함’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이자 ‘형벌’일지 모른다. 그 맛을 보게 하여 행복하게 하고, 그것에 빠져 파멸에 이를 수 있게도 했으니 말이다. 신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의 ‘자유의지’를 일깨워 주려는 요량이자, 너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려는 수작일 수도 있겠다.

마침내, ‘달콤한 유혹’에 빠져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파우스트. 그러나 파우스트는 끝내 구원받는다. 그가 빠졌던 ‘유혹’은 지식에 대한 욕심이었으며 그가 만족하여 내뱉은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다!’라는 말은 그가 이룬 유토피아의 서막을 보고 나서 던진 말이었다. 즉, 자신의 개인적인 쾌락이 아닌 다수의 타인을 위해 전력한 결과였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다른 이들을 위해 숭고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완벽할 수도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은 하늘의 구원을 받는 법이란 교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그러니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고 낙심할 필요 없다. 그리고 ‘달콤한 유혹’은 언제 어디서든 또 오게 될 것이다.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그 자체를 ‘악’이라고 탓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음 한다. 배불리 먹고도 다 먹어버린 아이스크림에 대한 변명이 이리도 길어질 줄은 몰랐지만, 그래 나는 다음번에 다시 그 아이스크림을 만난다면 이제는 거부할 수도 있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유혹’에 아니, ‘달콤함’에 빠져 보지 않는 도전. 그 뒤의 일을 생각해보는 자신을 향한 목소리. 다시, 아이스크림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무언가를 끊임없이 노력하자는 다짐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