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초. 무언가를 고민하고, 마음으로 다툴 만큼 긴 시간은 아니다. 긴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카페에서 무슨 커피를 마실지, 다 적어놓은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릴지 말지. 이런 걸 생각하기에 3초는 너무 짧다.

3초. 무언가에 감동하고, 감응하고, 피부를 적시는 감정에 몸을 내맡기기에 한없이 충분한 시간이다. 생각이란 걸 내팽개치고 “렛잇비” 하기에 딱 괜찮은 시간이다. 시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거나, 황홀한 그이의 미감에 단말마를 지르거나, 시험을 치르고 해방감에 기지개를 쭉 펴는. 이런 것들을 하기에 3초는, 그 적합함에 재차 3초만큼의 감동을 할 만큼의 시간이다.

3초. 물리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운 만큼의 시간이다. 도마뱀이 먼 길을 가고 얼룩말의 숨이 멎는, 봄비에 흠뻑 젖고 신발이 흙으로 뒤덮이는, 그런 만큼의 시간은 아니다. 그것보단, 손에 닿을 듯한 만큼만 떨어져 있는 벚꽃잎이 당신 손등으로 착지하는 데 걸리는 시간, 딱 그 정도다.

3초 전.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엔 두려움이 따를 수도 있고 설렘이 따를 수도 있다. 두 감정이 공존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와 키스하기 3초 직전이나 대학 합격 여부를 확인하기 3초 전, 학교에서 점심시간 종이 치기 3초 전, 새해맞이 3초 전, 퇴근 시간 3초 전. 기다림이 오랜 것이든 그렇지 않든, 3초 전의 기다림은 피가 가장 빨리 뛰고 숨이 조금 거칠어지는 순간이다.

3초 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보통 내가 한 일을 후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다. 모든 선택에 전적으로 만족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매 순간 후회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하고 나서, 빠른 길을 찾아 핸들을 꺾고 나서, 고민하던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화난 마음에 문을 쾅 세게 닫고 나서. 눈을 꾹 감고 손가락을 탁 탁 탁 세 번만 쳐도 찾아오는 그 순간 중에는, 마음 아찔한 장면들이 제법 많다.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있다.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만 없는 법이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의 반 타의 반’을 실천하는 퍽퍽한 삶들이 많다. 그래서 되도록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또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한다. 유튜브 광고를 3초 이상 보지 못하고, TV에서 광고가 나오면 곧장 채널을 돌려버린다. 지하철역에서 한 푼을 구걸하는 누구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멘토들이 있는 자리엔 늘 질문이 있다. 변화의 동력은 뭔가요. 새소리처럼 반복되는 질문의 답은 다양하지만, 또 일치한다. 일치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치하거나 혹은 삼치한다. 그만큼 비슷하다. 변화는 노력에서 옵니다. 노력. 생활계획표 없이도 반복되게 흘러가는 삶엔 변화가 없다. 그렇다고 그걸 위한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모든 일상에서부터의 탈출은 기회가 된다.

대단한 노력이 아니면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가요. 나는 “3초만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답한다. 넘기지 않고 본 유튜브 광고가, 고민 끝에 좋아하는 이에게 보낸 메시지가, 돈 내고 신청한 강연이. 어떤 것이든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작은 힘을 갖고 있다. 소소한 것들에서 기대를 꾀하는 건 변화가 일지 않더라도 일상을 희망차고 콧노래 나오게 할 수 있다.

3초만큼이라고 하면 작아 보이지만 그 정도도 힘든 일이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지, 죄송스럽지만 당신의 몫이다. 3초. 약하지 않다. 3초. 가볍지 않다. 3초. 해보라. 아, 3초. 3초 찬가라도 내야 할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