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에게 가장 두려운 말은 바로 ‘소환’이다. 소환이란 누구나 그 뜻을 알듯이 사람을 불러들인다는 뜻으로 사전적 의미를 보아도 ‘일을 마치기 전에’ 불러오게 하는 아주 무서운 단어다. 정치적으로는 ‘국민 소환’ 제도도 있어 주재원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에게도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일 터다. 물론, 요즘 사회를 어처구니없게 들었다 놨다 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직 다는 아니지만) 검찰이나 특검 ‘소환’을 당하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나 혼자 벌벌 떨 일은 아닌가 보다.

하지만 그래도 ‘소환’이란 말이 너무나도 도처에 깔려 있어 ‘소’자로 시작해서 ‘환’으로 끝나는 이 짧디 짧은 단어를 보기만 해도 마음이 언짢은 나에겐 자꾸 접하기 영 개운하지 않다. 물론, 내가 신경을 써서 자주 보이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임기 말년 차라서 이젠 좀 그 단어와 친해졌나 싶다가도 그렇지 않은 나를 발견한다. 그런데 바야흐로 ‘소환의 시대’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만큼, ‘소한’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보고 싶지 않은 단어가 송곳처럼 날카롭게 어디선가 튀어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주 옥수수 알갱이가 열에 달구어져 팝콘이 되는 것처럼, 주체를 못 하고 뚜껑을 밀쳐내고 나오는 듯한 모양새다.

어디 한 번 돌아볼까. 정치적인 그리고 범죄와 연루된 본연 그대로의 뜻인 ‘소환’ 말고도, 우린 노래를 ‘소환’하고 가수를 ‘소환’하고 문화를 ‘소환’하고 사랑을 ‘소환’ 한다. 미디어의 여기저기를 보면 ‘소환’이란 말을 쓰지 않고는 말이 안 이어질 정도다. 그것을 소재로 삼지 않고는 사람들을 끌어당길 어떤 매력적인 무엇이 없는 것 같다. 드라마와 노래, 그리고 그 옛날 연예인과 패션 등. 여기저기서 누구를 데려오고, 과거의 어떤 것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그 옛날 가사가 심오했던 노래를 곱씹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왕년’이란 꼰대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현세대 또한 ‘소환’된 그 옛날의 것들에 그리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이 더 크다. 그 옛날 것을 오히려 더 신선하고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니 말이다.

이쯤 되면 ‘소환’과 연관되는 또 하나의 단어가 떠오를 법하다. 즉, ‘복고(復古)다. ‘옛 제도나 모양. 정치, 사상, 풍습 따위로 다시 돌아감’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안다. ‘복고풍’이라는 단어에 더 친밀하여, 패션이나 문화에서 돌고도는 유행을 대변하는 말로 여겨지기도 한다. 즉, 사람들은 옛 것을 ‘소환’하며 살고 있다. 그 욕구가 하나 둘 모여 문화에 편승하고, 문화를 생산하여 흩뿌리는 이들마저도 옛 것을 소환하여 콘텐츠를 만들고 있으니 ‘소환의 시대’가 아니라고 할 수 없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소환’의 시대를 만들고 살아가고 있을까?

정의 구현을 갈망하는 자화상


먼저 ‘소환’의 원래 의미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기득권층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진 부정과 부패는 국격을 떨어뜨릴 정도로 만연하다. 우리나라의 복지가 개선이 더디고, 또 세금을 내는 것이 못 미더운 것은 바로 윗물이 맑지 않아서다. 나라의 곳간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많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주재하고 있는 유럽은 그래서 칭송받는다. 그래서 선진국이라는 말 그대로 앞서간 나라라는 이름을 갖는다. 기득권이 투명하다 보니 소득의 40~50%를 세금으로 내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있다. 그 세금이 나라에 잘 쓰일 것이라는, 그리고 나에게도 그 혜택이 올 것이라는. 우리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이런 ‘믿음’이 생길는지. 이런 답답한 마음에 그나마 기득권이라도 잘못했으면 ‘소환’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갈망이 커졌다. 당연한 것에 대한 갈망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건드리지도 못했던 그들을 ‘소환’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찾아가는데 초석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불확실한 미래, 옛것에 대한 그리움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최근의 트렌드는 90년대를 갈망한다. 90년은 문화 융성의 시기였다. 풍족한 경제발전을 토양으로 다양한 문화가 쑥쑥 자랐다. 서태지라는 문화 대통령이 나왔고, 노래방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발했다. 모든 국민이 마이크를 붙잡고 주어진 시간만큼은 가수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 물론, 이 때도 ‘복고’는 있었다. 다채롭고 개성 넘치는 문화 융성이 탐탁지 않았던 그 옛날의 어르신들은 ‘통기타’로 대변되는 70~80년대의 문화를 ‘소환’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90년대를 향유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어느덧 사회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된 바, 생산자와 소비자가 90년대를 집단으로 ‘소환’한 것이다. 젊은 세대 또한 이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SNS 등에서도 ‘소환’이라는 말을 즐겨 쓰다 보니 큰 거부감이 없다.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소환’이라는 것이 꽤 기특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어두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가수는 많은데 노래는 없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옛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요즈음, 가수는 알겠는데 그 가수에게서 딱히 떠오르는 그만의 노래가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불확실한 미래가 만연한 사회여서 그런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보다는 옛 것을 리바이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안정화를 지향하게 되었다. 영화마저도 재개봉을 시작했다. 검증된 영화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흥행 참패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계산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물론,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는 전제하에 옛 것을 참고하는 것은 좋지만 요즘은 그 수준을 넘어 옛 것을 그저 ‘소비하고 재생’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인간의 욕망


타임머신은 인류의 소망이다. 시간을 거슬러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후회되는 일을 바로잡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영화가 한 둘이 아닌 것은, 사람들의 욕망이 강하다는 반증이다. 타임 슬립의 영화나 드라마는 그 포맷이 거의 일정한데도 불구하고 지겨워하지 않는다. 아직도 시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거스르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은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 ‘원리’따위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을 거스를 수만 있다면’…이라는 욕망이 이성적 논리를 잠재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타임머신이 없는 우리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소환’이다. 내가 가지 못하면 옛 것을 불러오면 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갖고 싶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요즘 유행하는 어느 드라마에서도 한 여 주인공이 불꽃을 일으켜 그 불꽃을 끄면, 사랑하는 사람이 ‘소환’되는 설정으로 큰 인기를 끈다. 내가 원할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아니 갈 수 없으니 불러 내어 내 것으로 만드는 의식이 바로 ‘소환’인 것이다.

성장은 더뎌졌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미 풍족한데, 더 풍족해지지 못할 거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이 먹을거리가 없어 걱정하던 시대보다 사람들을 더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꺼내 든 것이 ‘소환’이라는 카드다. 옛 것을 불러와 현재와 미래를 위로해야 하는 우리는 과연 어떠한 상태일까? 잠시 향수에 젖어 그 좋았던 시간을 둘러본 들, 우리는 여전히 현재를 살아내고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소환’된다면 어떤 목적으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하지만 우리는 그 옛것을 ‘소환’하여 소비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현재를 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옛 것에 대한 좋거나 안 좋은 추억은 즐기고 반성하되 거기에 머무르면 안 된다.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도 젊음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사회가 잘못되고 경제가 어렵고, 기회가 줄어든다고 해서 마냥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복고를 ‘소환’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러한 이야기로 끝맺음하는 것이 비약적 일지 모르겠으나, ‘소환’이란 말에 벌벌 떨던 내가 하는 이 고민이 조금은 그 의미가 더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 녹아 있기도 하다.

아플수록, 어려울수록, 윗물이 마음에 안 들을수록 우리는 우리의 젊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키워 나아가야 한다는 나 스스로의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젊음’이란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소환’하고 싶은 그 무엇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