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는 말했다. 나는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다. 그렇게 그는 우리들에게 정신승리법이라는 고유의 의지체계를 전수하였고,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졌다.

내가 다니는 학과 특성 상 리서치를 자주 하다 보면 ‘X세대’, ‘베이비붐 세대’ 등 다양한 특징을 지닌 집단을 접하게 된다. 타겟은 마케팅 전략에 더 적절하고 특징적일수록 좋다. ‘캥거루족’, ‘그루밍족’이 그 예다. 얼마 전 20대 소비자를 조사하다가 ‘ㅇㅈ세대’라는 말을 접했다. 피식 웃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주 쓰는 ‘인정?’이라는 말이 우리를 상징한다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나 ㅇㅈ세대의 뜻과 그것이 그리는 이 시대 20대의 초상은,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가볍진 않다. ㅇㅈ세대의 정확한 뜻은 ‘SNS 인증샷’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팔로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2030의 욕구를 내포하고 있다.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말의 어감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러한 심리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원인을,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청년들이 시달렸던 감시당하는 두려움과는 다른 요즘 청년들의 ‘소외’당하는 두려움”이라고 진단한다. ‘소외당하지 않는 통로‘로 SNS를 택한 것이다. 패배하지 않으려면 싸워야 하듯,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살아내야 한다. ‘ㅇㅈ세대’를 살아내기 위해선 미생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 일은 내가 할 수도 있고, 당신이 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할 수도 있다.

언젠가 확실한 것이 정해지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했다. 어쩌면 그것은 곧 끝날 것 같은 이야기였다.

궁금해진다. 여기서 ‘소외당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으로부터의 소외’를 뜻하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SNS를 즐기는 나의 주변 사람들은 소외되어있다고 할 만큼 적적하지 않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아니, 백 번 양보하더라도 ‘두려움’을 젊은이들의 특징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건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한다.‘ㅇㅈ세대’는 2030 연령대를 지칭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2030일 뿐이지, 10년이 지난 후의 ‘ㅇㅈ세대’는 3040과 새로 자라난 20대 ‘ㅇㅈ세대’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ㅇㅈ세대’로 산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생을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두려운 생을 사는 일은 결국 산다기보다 살아내는 일이다.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떳떳하지 못한 나 자신이 자연스럽게 냉소의 대상에 해당되기 때문에, 냉소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나를 심판대에 세운다는 말과 비슷하다.

나도 SNS를 한다. 업로드를 자주 하진 않지만 강연에 가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내 계정에 ‘인증샷’을 올린다. 수시로 ‘좋아요’의 개수를 확인한다. ‘좋아요’의 개수는 때때로 내 기분을 좋게 한다. 나 역시 ‘두려움’을 안고 있는 셈이다.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우리는 그것을 수정하지 못했다. 어쩌면 수정하고 싶지 않았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고민에 대한 조언은, 주로 “남과 비교하지 말고 스스로를 인정해주어라”이다. 참으로 맞는 말 같지만 이 조언은 미생들이 사는 현실의 경계를 벗어난다. 미생이 아닌 ‘완생(完生)’을 사는 사람의 한 마디는 화자의 위치가 미생을 벗어났다는 사실에서부터 신빙성을 잃는다. 대중매체가 그리는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의 머리를 가득 채운 이상적인 것들은 완생들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의 유무는 지배관계를 독촉한다. 가령, ‘엄친아’와 같이 사회의 기준을 잣대로 한 말로는 손톱 끝부터 다른 학생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없다. 패배하지 않으려면 싸워야 하듯,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살아내야 한다. ‘ㅇㅈ세대’를 살아내기 위해선 미생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 일은 내가 할 수도 있고, 당신이 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할 수도 있다.

어떤 명목에 의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회사를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서 내리면, 젊은 학생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모여있다.
편의점에서 간단한 아침을 사고는 황급히 뛰어간다. 이 같은 날이 며칠 반복되다 회사 근처에 재수학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그때는 여느 고등학생과 같이 대학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원하는 대학에, 이름있는 대학에 가지 못하면 내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고 내가 공부 때문에 우는 날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1학년 때는 방대한 공부량에 놀라다 시간이 지나고, 2학년이 되어 어느 정도 게으름까지 겸비해 온 열정을 끌어모아 친구들과 놀고, 3학년 때는 정말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절망으로 공부했다. 점심시간에도 공부, 주말에도 공부, 11시 학원이 끝나면 집으로 가서도 공부공부공부. 정말 질릴 만큼 하고 나니 내 수능이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느꼈을 땐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 생각하니 정말 내게 대학이 절실했더라면 재수를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목표를 잃은 나는 입시 책의 광고성 인터뷰에 마음이 혹해, 이곳이 아닌 지방의 아무 대학에 원서를 넣었고 도망친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20대의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험을 아주 만족스럽게 잘해냈다는 것에 뿌듯하다. 다행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이 아주 뚜렸했다. 나는 다른 고등학생들이 성적에 맞추어 과를 선택할 때, 내가 원하는 확고한 과가 있었다는 게 행운이었다. 그것은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해주는 아주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치열함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결론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보다 가볍고, 아주 특수한 이론보다는 훨씬 무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자기계발서가 그러하듯, 나조차도 과거를 회상하면 안 좋았던 기억보다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음 마음인지- 좋은 것들만 기억이 난다. 하지만 기대하던 이상에서 미끄러진 현실은, 어떻게 미화를 한다 한들 최악이다. 무엇을 하던 간 후회가 남았고, 현재를 보기보다 과거를 기억하며 지냈다. 이상향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무엇이든 의미 없는 것이었고, 다 부질없는 짓이라며 혼자 제 잘난 멋에 취해 있었다, 재수할 용기도 없으면서. 중2병이라 생각할 만큼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때의 그 순간만큼은 그 감정에 고양되어도 좋다. 회상하는 지금도 잘 기억 안 나는 그대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니, 충분히 취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좋아진 게 언제부턴 지도 기억은 안 난다. 단순히 사람이 늘 기분 안 좋아 있을 수도 없고, 모든 게 새로울 새내기니 금세 학교생활이 재밌어졌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의지박약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만드는 건 환경이고, 환경은 재밌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뭐 누가 본다면 나는 타협한 도망자이겠지만.

터무니없는 기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정확했다.

삼학년이 되고 슬슬 졸업을 준비할 때가 되자 학교는 더이상 그저 학교가 아니게 되었다. 학교에서 생활하며 밤새는 일상이 늘어나고, 실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하니 학교가 내게 주는 것들이 새삼 많다는 것을 느꼈다. 교수님과 동기들과 부대끼는 것에 애틋한 마음마저 들었다. 도망자였다면, 졸업장에 찍힐 잉크가 마르는 것에 겁을 먹었겠지만. 그리고 나는 내가 나온 학교를 정말 사랑한다. 그 학교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없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러고 보니 나와 비슷한 친구가 있었다. 둘 다 원하는 대학에 원서를 넣지도 못할 정도로, 폭격을 맞은 수능 성적표를 들고 함께 울었다. 그때 처음 공부로 눈물을 흘리며, 그래도 내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는 자신이 들어간 차선의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게 싫어, 학교보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등교를 했다. 종종 들리는 소식에 거의 사년을 분노로 대학 생활을 한듯했다. 하지만 그 분노의 분출 방향은 아주 옳았기에, 수석으로 졸업하곤 결국 자신이 원하던 대학의 대학원으로 들어가 자신의 마지막 학력을 바꿔 찍었다.

알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것을 이루려고 했는지 말이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물론 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수많은 실패를 맛보았다. 분명히 A에다가 +일 학점이라 생각했던 과제에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편입을 생각하고 시험을 보면서도 실패하고. 실패라는 것은 사람을 정말 부끄럽게 만들고, 내 가치에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아직도 실패는 두려운걸 보면 영원히 두려운 존재일 것이다.

법은 많고, 하나의 실패가 끝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쨌거나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 하지만 그 속에서 실패를 빨리 탈출할 수 있는 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다. 목표를 이루는 척도는 무척이나 많고 다양해서 목표를 이루고 있는 와중에도 의문이 들 것이다. 그리고 실패를 겪게 되면, 그 실패가 아주 크게 우리의 인생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척도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어떠한 방법이더라도 목표는 우리를 이끌 것이다. 나는 자기계발서의 유명인들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대기업이 아닌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고 우리는 다수의 집합체다. 우리는 우리의 페이스로 달리면 된다. 실컷 좌절했다가, 목표를 찾고 일어나고, 아파했다가 웃는 그런 삶을 살면 된다.

…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